아니, 30년 전 소나기를 함께 맞았던 그 소녀는 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 있을까?
아련한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순수함은 간절함이 되어 기억으로 남아 다시 한 번 그때의 순수함과 설레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힌다.
노도영 작가의 인공지능 소설 ‘백 번째 소나기(The 100th Shower)’는 독자에게 이러한 물음과 사색으로 가득 차 오르게 만든다.
이 소설은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 장르이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AI 셔플(Shuffle) 형식을 도입한 SF 휴먼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국민 소설인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가 서정적인 멜로를 담았다면, 이 소설은 서사적으로 SF 휴먼 로맨스이면서 형식적으로는 실험적 인터랙티브 소설 형태를 띠고 있으며 테크 휴머니즘이라는 매우 독창적인 주제 의식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던 소녀의 말은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암시였을까.
소설은 원작 소나기의 열린 결말을 비틀며 시작된다.
소나기의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30년이 지나 중년이 되어 파리의 몽마르뜨 공원에서 조우하게 되지만 비극적이게도 두 사람은 모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과거의 기억으로 남아있던 소녀는 한국어마저 잊은 상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두 사람은 시각과 언어 대신 빗방울의 촉각과 30년 전 응고된 기억의 파편인 조약돌과 체온을 통해서 서로를 느끼게 된다.
백 번째 소나기는 고전적인 첫사랑의 순수함을 미래 기술(SF)로 재해석하고, 독자가 직접 순서를 선택해 완성하는 셔플 형식의 파격적인 실험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을 기존의 기승전결 형식의 도입,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라는 플롯 대신 카드 게임에서 카드를 섞듯이(Shuffle) 소설의 챕터 순서를 독자가 마음대로 섞어서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0개의 장면(챕터)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해 어떤 장면을 먼저 읽든 이야기가 성립된다.
10개의 장면을 나열하는 경우의 수는 무려 362만 8,800가지로, 노도영 작가는 경우의 수를 모두 담을 수 없어 AI가 추천한 21가지의 배열을 책에 소개했다.
10개의 접시가 나오는 코스 요리가 있다면 나오는 순서를 섞는 방법은 놀랍게도 수학적으로 362만 8,800가지나 되는데 이 10개의 챕터는 360만 여 가지 순서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순서를 AI가 엄선해 셰프의 추천 코스를 만들어 준 것이다.
따라서, 읽는 순서에 의해 이야기가 달라지며 똑같은 10개의 장면이라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에 따라 인과 관계나 감정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행복한 장면을 먼저 읽고 슬픈 장면을 나중에 읽는 것과 반대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노도영 작가는 이를 두고 “당신이 선택한 순간이 곧 소설”이라며 “독자가 직접 이야기를 완성하는 창조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음식점에서 이것을 주문할까? 아니면 저것을 주문할까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에서부터 사랑한다고 고백할까? 아니면, 평생 가슴 속에 묻고만 살아야 할까? 이처럼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뇌와 번민에 휩싸이며 살아간다.
선택할 대상이 많아지면 순간적으로 선택 장애가 걸리기 쉬운데 작가는 무책임(?)하게도 독자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작가의 태도가 불친절하고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하나의 소설 게임처럼 흥미진진한 재미가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노도영 작가는 “우리의 인생이 소설처럼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직렬(CPU)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병렬(GPU) 상태에 가깝다”고 말한다.
수많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열린 소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개념을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찰자가 미시 입자를 관측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듯 이 소설의 10개 장면 또한 독자가 읽기(관측) 전까지는 연결되지 않은 채 무한한 가능성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양자역학에서 관측이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독자의 선택이 곧 관측이며 독자가 장면의 순서를 정하는 순간 물결처럼 퍼져 있던 362만 개의 가능성이 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현실)로 확정된다는 논리다.
노도영 작가는 이러한 양자역학적 특성을 컴퓨팅 기술에 빗대어 전통적인 소설이 순서대로 처리하는 CPU(직렬) 방식이라면, 이 소설은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GPU(병렬)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30년 만의 해후는 30년이라는 물리적 단절과 신체적인 단절로 이어지며 시공간적인 상황에서 소통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노도영 작가는 반려견을 키우며 얻은 통찰력을 빗대어 “강아지의 짖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고, 강아지도 인간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할 뿐이지만 서로 얼굴을 부비며 안아주고 안기며 체온을 나눌 때 전해지는 위안은 진짜”라고 말한다.
언어나 시각적 정보가 없어도, 존재가 곁에 있다는 감각만으로도 정서적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작가가 측량 및 지형공간정보기술사라는 공간정보 엔지니어 출신답게 소통의 연결을 데이터와 클라우드의 개념으로 확장했다는 점에 매우 인상적이다.
인간의 육체(하드웨어)는 시력을 잃거나 늙어서 기능을 상실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안에 저장된 기억(소프트웨어/데이터)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노도영 작가는 기억이 기록으로 남아 데이터센터에 저장된다면, 육체가 소멸한다고 해도 그 사랑과 기억은 재생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두 사람의 연결은 관념적인 영혼의 교감이 아니라, 공유된 기억 데이터가 빗소리라는 자극을 통해 동시에 접속(동기화)된 현상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음이 통했다는 막연한 낭만보다는 입력값(비, 체온)이 동일한 기억 데이터를 동시에 출력해냈다는 일치감 내지 일종의 인지과학적, 혹은 SF적 접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노도영 작가는 이를 통해 “보이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하나로 이어져 있다”며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과거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은 망각의 너머로 사라진 지금의 나는 어떤 입력값을 들고 그 순수의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저작권자 ⓒ 커넥트 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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